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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C 로그 :: 그림자를 위한 세레나데 上 / 솔음사헌

* 후원자 x 발레리노 AU

* 서양배경으로 영문이름을 사용합니다. 

김솔음: Leander Fawn

백사헌: Severin Blanc 

 

* 시나리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시나리오의 원본 링크 : https://www.postype.com/@yelloduck72/post/9761711

* 사용한 인트로 링크 : https://colorname1357.tistory.co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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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rin Blanc:(그야 뒷정리를 시킬 테니까요. 수당도 안 주는 허드렛일은 최대한 빠지는 게 이롭습니다.)
(땀내 풍기며 뻑뻑 흡연이나 해대는 놈들 사이에서 폐를 깎아먹는 것보단 춥지만 바람이라도 통하는 계단에 앉아있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비록 곰팡내가 엄청나지만.)
(…게다가.)
(고생했어. 좋은 연극이었어. 관객수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하고 지들끼리 빈말 주고받으면서 위로하는 거 보고 있으면 진짜 토 나옵니다.)
씨발……(이딴 구질구질한 곳에서 엉덩이 붙이고 앉은 나도 병신이지. 한숨을 쉬면서 벽에 머리를 쿵 기댑니다. 좀 더 뻐기다가 들어갈 셈입니다.)
단장: Severin.
Severin Blanc:……!
아, 단장님! 혹시 찾으셨나요? 전 잠깐... 여운 좀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대 감동이 너무 커서요, 하하…
Severin Blanc:저, 근데 옆의 분은…?
단장: 거, 하도 널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다.
Severin Blanc:저를요? 왜요?
(진심으로 이해 안 간다는 눈으로 자신을 가리킵니다. 뭐, 팬 같은 건가? 주연도 아닌 일반 단원 나부랭이한테?)
단장: 암튼 만났으니까 얘기하쇼.
Leander Fawn:…………
Severin Blanc:……
……어. (뭔데, X발.)
Leander Fawn:생각보다 순진하게 생기셨군요.
Severin Blanc:(칭찬이야 시비야?)
아, 그런가요? 종종 듣긴 합니다.
(일단 무난하고 순한 웃음으로 받아칩니다. 단장이 데려온 놈이라면 비위를 맞춰둬야 귀찮은 일이 덜 생기겠지.)
제 얘기를 어디서 많이 들으셨나 봐요? 관객으로 오신 거라면 제 얼굴 정도는 익숙하실 텐데… 뭐, 제가 무대를 자주 밟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상에 남는 얼굴이라는 평은 자주 듣거든요.
Leander Fawn:무대는 제법 여러 번 봤습니다. 눈에 띄는 분은 아니셔서, 이렇게까지 경계심 없는 인상일 줄은 몰랐군요.
…아, 실례.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Severin Blanc:(이 개자식 봐라?)
아, 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떨립니다.)
그럼 앞으로 더 많이 와주세요. 제 얼굴 보러.
자주 오시지 않으면 기껏 본 얼굴이... 다시 기억에서 흐릿해질 수도 있잖아요?
다음 번에 만나면 제가 먼저 인사드릴게요.
(최선을 다해 부드럽고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너라도 표 좀 팔아줘라. 입장료 그 쥐꼬리만한 돈을 득달같이 나눠먹고 있으니 나한테 떨어지는 게 있어야지……)
Leander Fawn:굳이?
Severin Blanc:네?
아, 아니… 제가 마음에 들어서 보러 오신 거 아니에요?
(살짝 당황합니다.)
다른 이유로 찾아오신 거면… 방금 말은 그냥 잊으시고요.
Leander Fawn:마음에 든 건 맞는데.
Leander Fawn:내가 자주 오지 않아도, 그쪽이 눈에 띄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Severin Blanc:(그게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단숨에 불퉁한 표정이 됩니다.)
근데요. 왜 은근슬쩍 반말을……
Leander Fawn:독무를 보여주시죠.
Leander Fawn:내가 보기에 그쪽은 충분히 할 수 있거든.
Severin Blanc:(지랄. 지가 날 언제 봤다고……)
뭐, 당신 발레 잘 알아요?
Leander Fawn:잘 알지.
네가 이런 낡아빠진 극장에서 썩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Severin Blanc:(눈에 경계심이 서리고, 목소리가 낮아집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그쪽이 꺼내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Leander Fawn:글쎄.
하지만 기어 나오겠다면 손 정도는 내밀어줄 수 있어.
Severin Blanc:하……(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립니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헝클이며 쏘아붙입니다.)
씨발. 미친 새낀가.
야, 개소리 집어치우고 꺼져.
Leander Fawn:(눈만 살짝 가늘어질 뿐, 표정엔 흔들림이 없습니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부드럽게 갸웃합니다.)
그래. 그 정도 날은 세울 줄 알아야지.
그런데 진짜 내쫓고 싶었다면 눈빛부터 정리하지 그랬어.
숨기고 싶은 감정은 좀 더 깊이 묻는 법도 익혀둬야 해. 연극은 무대 위에서만 하는 게 아니잖아?
Severin Blanc:……(턱이 굳고 눈에 살짝 핏발이 섭니다.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끊습니다.)
남 사는 거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도 있고 한가해서 아주 좋으시겠어.
내 눈빛이 어떻든 감정이 어떻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훈계질이야. 공연 쳐보러 왔으면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꺼져.
Leander Fawn:(가볍게 웃습니다. 방금의 욕설도, 날선 감정도 마치 처음부터 계산에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부탁한 거였는데.
네 무대를, 진짜 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싶었거든.
Severin Blanc:말귀 못 알아들어? 비켜!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롭고, 거침없이 남자의 어깨를 밀칩니다.)
Severin Blanc:…? (움직임이 멈추고 시선이 봉투에 박힙니다.)
Leander Fawn:관람료.
Severin Blanc:……(그 말에 슬그머니 팔을 내립니다.)
…얼만데요.
Leander Fawn:──(조용히 금액을 말합니다. 그 액수는, 오늘 공연 입장료의 여섯 배.)
Severin Blanc:……!! (눈이 커집니다. 숨이 잠깐 멎은 듯 얼굴 근육이 살짝 경직됩니다.)
아니, 그런 걸 준비해오셨으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선생님.
(어색할 만큼 돌변한 웃음과 함께 목소리는 단번에 부드러워집니다. 방금 전 욕설을 날리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Leander Fawn:보여줄 거지?
Severin Blanc:물론이죠! (활짝 웃습니다.)
Severin Blanc:좋아하는 극 있으세요?
Leander Fawn:딱히. 네가 자신 있는 걸로 해.
Severin Blanc:아, 네… (일단 무대에 올라갑니다. 다행히 아직 플랫 슈즈를 신고 있긴 한데…)
(갑자기 요청받은 독무. 지금의 자신은 무대 가장자리에 머무는 코르 드 발레에 불과합니다. 관객의 시선이 온전히 나를 향하는 경험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습니다.)
(…뭘 해야 하지. 조금 아연해진 채 무대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체온 유지를 위해 걸치고 있던 외투에 시선이 닿습니다.)
(떠오르는 옛날 기억. ……입을 꾹 다물고는 셔츠를 벗어 허리에 감습니다. 가죽끈도, 핀도 없습니다. 단지 헐렁한 셔츠 하나.)
(킬트를 대신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조악하지만…)
(정말 발레를 아는 놈이라면, 알아채겠지.)
Leander Fawn:(그가 허리에 두른 셔츠가 눈에 들어옵니다. 타탄 계열의 체크 무늬. 그리고 발끝에 체중을 걸치듯 살짝 얹은 로맨틱 발레 특유의 무중력 같은 시작.)
(…그걸 하려나 보군.)
(시작하면 확신할 수 있겠지만, 직감이 먼저 웃고 있습니다.)
Severin Blanc:(숨을 한 번 들이쉬고, 살짝 앞에 놓인 한쪽 발로 중심을 응축하듯이 몸을 기울입니다. 어깨는 부드럽게 내려가 있지만 손끝은 예민하게 살아있습니다.)
(고개는 정면이 아닌, 어딘가의 허공─마치 실피드가 사라진 자리를 더듬듯 올라가 있습니다. 눈빛에 갈등과 집착이 서립니다.)
(그리고─)
Severin Blanc:(그 음악에 맞춰 제임스 바리에이션을 펼칩니다. 라 실피드 제2막, 환영과 집착이 교차하는 그 장면을.)
Severin Blanc:(무대 좌우를 번갈아 가로지르며 가브리올과 씨스를 연속으로 전개합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이어지는 점프의 향연. 밝고 경쾌하지만, 마치 벼랑 앞에서 춤추는 듯한 위태로운 동작입니다. 물론 춤선은 흔들림 없이 깔끔합니다.)
(완벽한 5번 자세에서 시작되는 뚜르 앙 레르. 도약과 회전, 착지가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도 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음 동작을 준비합니다.)
Leander Fawn:…………
Severin Blanc:(낮고 깊은 플리에. 그 다음은 솟구치는 듯이 가볍고도 집요한 도약.)
(직후 이어지는 동작은 주특기인 랑베르세입니다. 회전축을 정확히 잡은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유려하게 다리를 휘돌립니다. 발끝이 그리는 궤적은 마치 순간을 베어내듯 날카롭고, 허리의 유연한 각도와 팔의 곡선은 더없이 부드럽습니다. 미친, 방금… 진짜 완벽했어! 그 짧은 찰나에 환희로 벅차오릅니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등하던 청년은 무대 끝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팔을 허공으로 뻗습니다. 잡히지 않는 실피드를 갈구하는 제임스처럼.)
(끝. 정적. ……헉, 후우. 헐떡임과 함께 팔이 천천히 떨어지고, 환멸과 상실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텅 빈 눈으로 관객석을 바라봅니다.)
#1
동료: Severin!!
동료: 뭐야, 멍하게 서서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Severin Blanc:…딱히. (그때처럼 날이 추워서 그런가.)
동료: 그나저나 이거 봤어? 지금 너만 빼고 단원들 다 알아!
ㅇ
동료: "최근 주목하고 있는 발레리노가 있냐"는 질문에, 크리스티는 주저 없이 Artic Owl 발레단의 Severin Blanc을 언급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주연 역할을 얼마나 잘 소화해낼지 기대된다"며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동료: 와, 세베린 너 진짜 대단하다…! 크리스티 입에서 직접 네 이름이 나올 줄이야!
이제 전국에 다 알려졌네. 우리 발레단 자랑이야, 진짜! 얘들아, 이건 박수 한 번 쳐줘야 하는 거 아니야?
Severin Blanc:(…왜 쓸데없이 떠들어서 주목 끌고 난리야. 이런 일로 괜히 눈에 띄어봤자 좋을 거 없다고. 이 자식 설마 나 엿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빌어먹을… 귀찮게.)
(과분하다는 듯 쑥쓰러운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겸손하게 말합니다.)
하하… 괜히 기대만 잔뜩하셨다가 실망하셔서 독설이라도 듣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관심 가져주시니… 영광이죠, 뭐.
다들 감사해요.
동료2: 어우, 좋겠다. 부럽네.
동료3: 근데 지금 들은 건 아니지? 자기 얘긴데 관심 좀 가져.
Severin Blanc:(겠냐? 신문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사서 확인했는데.)
(이 사람 눈에 띄려고 내가 얼마나 개처럼 뛰었는데. 나 말고 다른 이름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아, 최근엔 공연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요… 신문 볼 겨를도 없었네요.
그래도 그만큼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무대 위에서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수줍은 듯 웃어 보입니다.)
Severin Blanc:(…그래서 오늘은 리허설도 더 빡세게 했습니다.)
동료2: 아무튼 수고해라. 너라면 잘하겠지만.
동료: 나중에 스타됐다고 우리 발레단 버리면 안 된다? 응? 약속이야!
Severin Blanc:당연하지. 여긴 내 집 같은 곳인데, 내가 여길 어떻게 떠나. (응, 캐스팅 들어오기만 해봐. 바로 손절이야.)
Severin Blanc:(…바로 무표정이 됩니다. 하여간 성가신 것들.)
Severin Blanc:(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편지를 읽어봅니다.)
Severin Blanc:(직접 찾아오질 않으니 비위 맞춰줄 필요 없어서 편하긴 해. 돈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필요한 건 빠짐없이 챙겨주고, 연락이나 이상한 요구도 없고. 그런 점은 참 좋은데…)
(근데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춤이 어땠는지 입으로 듣게 해줄 법도 하지 않나? 그놈의 '짧은 감상평'이 전부야, 매번.)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후원하는 건지, 내 성장을 지켜보면서 자기 만족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조용히 사람 하나 키워내는 걸로 우월감 느끼는 개싸이코새끼인 건지.)
(꿍꿍이를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Severin Blanc:(…뭐, 나한테 손해인 일은 아니긴 합니다.)
(이 사람 없었으면 아직도 그 싸구려 극단에 틀어박혀 있었겠죠. 내가 뭘 추든 좆도 관심 안 가지던 그 빌어먹을 극단.)
(어깨를 으쓱하며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브로슈어를 살펴봅니다.)
Severin Blanc:(발레극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꿈이니 사랑이니 구원이니… 뻔한 이야기, 뻔한 감정, 뻔한 몸짓.)
(어차피 꿈은 죽음, 사랑은 불륜, 구원은 배신으로 이어질 텐데.)
(결국 누가 더 ‘아름답게 부서지느냐’로 경쟁하는 무대에서 예술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나?)
(이번 극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악몽, 상처, 환상─죽음으로의 탈출.)
(언제나처럼 고통은 번지르르하게 포장되고, 춤은 죄다 눈물 젖은 시처럼 짜여 있죠. 그리고 꼭 주인공은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고요.)
(그런 걸 보고 감동했다느니, 아름답다느니 떠드는 사람들… 씨발, 그냥 남 고통받는 거 보면서 도파민 느끼는 거잖아. 진심으로 이해 안 됩니다. 미친놈들 아니야?)
(하지만 까라면 까야죠. 이게 내 밥줄이니까. 이득 앞에서 얼굴에 철판 까는 건 이제 체질이 됐습니다. 까짓것, 기대대로 완벽히 연기해줄게.)
Severin Blanc:예에, 갑니다. 가야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나갑니다.)
Severin Blanc:(오늘 무대의상은 안개 낀 새벽빛의 느낌을 주는 실버 그레이의 새틴 소재 셔츠입니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는 약간 주름이 잡힌 블루 톤 오간자가 덧대어져 있습니다.)
(허리는 좁고 잘록하게 잡혀 있으며, 하의는 슬림한 컷의 검은 발레 타이즈를 입었습니다. 절제되었지만 선명한 라인이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립니다.)
(슈즈는 짙은 자주색 벨벳을 덧댄 소프트 슈즈. 얇은 은색 체인이 사선으로 교차된 슈즈는 피부처럼 발등을 섬세하게 감싸줍니다.)
Severin Blanc:
건강
기준치: 65/32/13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Severin Blanc:(언제 내 몸 상태 봐가며 무대에 오른 적 있었나. 열이 펄펄 끓든, 발목 인대가 끊어질 것 같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점프하고 파트너를 떠받치는 것. 그게 발레리노라는 직업이니까.)
(관객은 '멜'이 아픈 건 감동이라며 받아들이지만, 가 흐트러지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티내서는 안 됩니다.)
Severin Blanc:(한순간 숨을 고른 뒤, 리듬에 맞춰 무대 중앙으로 빠르게 나아갑니다. 왼발을 앞으로 곧게 뻗으며 탄듀. 단단히 중심을 잡은 채 오른팔을 위로 섬세하게 들어올립니다.)
Severin Blanc:
예술(무용)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느린 템포의 선율 위로 애티튜드 자세를 취합니다. 살짝 굽은 등,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동작.)
(몇 발짝 휘청이며 내딛는 샤세, 희미한 빛을 향해 손을 뻗지만 '멜'은 언제나 허공을 움켜쥘 뿐입니다. 이어 파 드 부레로 뒤로 물러납니다. 마치 꿈이 그를 밀어내듯.)
(고통에 발버둥치듯 푸에테 턴이 이어집니다. ……아, 방금 축 조금 흔들렸나? 일단 뻔뻔하게 다음 동작을 이어갑니다.)
Severin Blanc:(빙글빙글 돌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열이 오르는 건지. 머릿속이 평소보다 어지럽습니다. 균형이 미세하게 어긋나는 느낌. 아, 진짜 이 타이밍에 왜 감기 따위를…)
(그래도 어찌저찌 큰 실수 없이 마무리 구간에 들어섭니다. 아파 보이는 표정이 오히려 더 먹혔을지도. 이 정도면 연습의 90퍼센트는 뽑아냈겠죠.)
Severin Blanc:(…탄식? 왜?)
Severin Blanc:(미친, X됐……!)
쿵!
Severin Blanc:……(졸린 눈을 깜빡깜빡합니다. 여기, 어디지… 극단의 숙소는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침구, 되게 부드럽네… 비몽사몽한 채로 이불을 푹 끌어안아 몸을 파묻습니다.)
Severin Blanc:(…누구?)
집사: 일어나셨습니까?
Severin Blanc:아, 네… (살짝 당황하면서 상체를 세워 일어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집사: 정신이 드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무대에서 떨어지신 뒤로 줄곧 의식이 없으셨거든요.
Severin Blanc:그… 제가 무대에서 떨어졌나요? 그때 기억이 좀 흐릿해서…
집사: 예. 꽤 높은 곳에서 추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으나 고열로 한동안 앓고 계셨습니다.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만… 상태를 보니 움직이시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Severin Blanc:…그렇군요. (하… 관객들 볼거리 하나 제대로 얻었겠네. 기사는 또 얼마나 비웃듯 써댔을지.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
(…그냥 바닥에 부딪혀서 아픈 건가? 아, 모르겠다.)
근데 여긴 어딘가요? 병원은 아닌 것 같은데.
집사: 아, 이곳은 폰 저택입니다. 주인 어른의 명으로 공연 직후 모셔왔습니다.
Severin Blanc:폰…?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인상을 살짝 찌푸립니다.)
집사: 아.
집사: 모르고 계셨군요. 당신의 후원자 되시는 분 말입니다.
주인 어른께서는 오래전부터 당신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곳은 그분의 저택이지요.
Severin Blanc:……!
집사: 폭설로 인해 외부에서 의사를 부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집사인 동시에 의학 지식이 조금 있어, 미흡하나마 직접 상태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Severin Blanc:아, 감사합니다…
…근데 그분, 지금 여기 계신가요?
집사: 주인 어른께서는 지금 아래층에 계십니다.
Severin Blanc:(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살짝 쥡니다. 왜인지 위가 살짝 뻐근한 느낌과 함께 속이 미묘하게 울렁거립니다.) 어, 음…
그, 혹시 주인 어른을 직접 뵐 수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신세를 졌는데, 인사 한마디 없이 머무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집사: 물론입니다. 주인 어른께서도 당신과의 만남을 오래 기다려오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몸을 정돈하신 뒤 인사 나누시지요. 욕실은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Severin Blanc:……(고개를 꾸벅, 숙입니다.)
Severin Blanc:(지나치게 정성스러운 접대에 의심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씻을까.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며 거울 속 자신의 몰골을 힐끗 봅니다.)
(창백한 얼굴, 다소 퀭한 눈, 잔열이 도는 발개진 귀… 하.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립니다.)
(이런 꼴로 무대에 올랐으니 떨어질 만도 했지. 바보 같아.
(몸을 담그자, 딱 좋은 수온의 물이 스르륵 피부를 감싸안습니다.)
(전신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 아찔한 기분에,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툭 기댑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감습니다.)
(후원자라… 웃기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순수히 헌신하는 사람이라니. 그딴 게 세상에 존재할 리 없잖아. 결국은 다 계산이 깔린 호의일 뿐.)
(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유혹도 스치듯 지나갑니다. 포근한 물속, 편안한 고요가 맴도는 욕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공간 너머로 밀려난 것처럼.)
(…물 위에 손가락을 살짝 띄웁니다. 장미잎을 콕, 찔러 밀어내며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립니다.)
Severin Blanc:……(이건 좀 소름돋는데. 내 사이즈를 대체 어디서 알아낸 거야?)
(어깨선이며 허리선, 심지어는 팔길이까지도 어색함이 없습니다. 처음 입는 옷인데 이상하리만치 익숙합니다.)
(한동안 거울 앞에 선 채 옷깃을 매만지며, 그 익숙함이 주는 묘한 감각에 사로잡힙니다……)
(후원자 놈, 설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집요한 변태 새끼인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돼, 제발.)
Severin Blanc:(꿀꺽.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섭니다…)
ㅇ
Leander Fawn:……
Leander Fawn:어서 와.
Leander Fawn:오랜만에 보네. 일단 앉아.
Severin Blanc:……
Severin Blanc: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9
판정결과: 보통 성공
Severin Blanc:(지팡이에 눈길 한 번 주고는 곧장 걸음을 옮겨, 남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습니다.)
오랜만…(오랜만이네? 라고 말하려던 입술이 멈칫합니다. …반말을 써도 되는 걸까? 상대는 이 사치스러운 저택의 주인이자 자신의 후원자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을의 입장인데, 예의 없게 대했다가 괜한 불이익이라도 생기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존댓말을 쓰자니 그건 또 입이 까끌거립니다.)
(결국에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쳐다봅니다.)
Severin Blanc:(덩달아 차를 들이켰다가, 혀를 덮치는 뜨거움에 화들짝 놀랍니다. 악, 씨발…)
Leander Fawn:방향 틀었어? 발레가 아니라 광대극으로?
Severin Blanc:아씨… 아니거든요!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죠!
Leander Fawn:난 별로 안 뜨겁던데.
(보란듯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십니다.) 입은 괜찮아?
Severin Blanc:……괜찮아요. (재수없는 자식…)
Leander Fawn:(쿡쿡 웃으면서 손짓으로 집사를 부릅니다.) 얘는 차가운 걸로 다시 줘.
그리고 다과도. 종류별로 빠짐없이.
집사: 알겠습니다.
Severin Blanc:(남자를 뚱하게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 말합니다.) 한가하게 디저트 먹으러 온 건 아닌데요.
Leander Fawn:여긴 내 저택이니까 규칙은 내가 정해.
마음에 안 들면… 무대에서 떨어지지 말았어야지.
Severin Blanc:와… 죽을 뻔한 사람한테 말 참 쉽게 하시네요?
Leander Fawn:엄살은. 그 정도 높이에선 안 죽어.
Severin Blanc:골절이라도 됐으면 발레리노한테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거든요?
지 몸 아니라고…(궁시렁거립니다.)
Leander Fawn:……
Leander Fawn:발목, 아파?
Severin Blanc:네? (안 아프긴 한데.)
(그래도 지금 아픈 척하면 뭐 좀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네… 아파요.
(찡그린 얼굴로 발목을 매만지며 작게 숨을 쉽니다.)
아까 계단 내려올 때도 찌릿찌릿하더라고요. 이거 후유증 남는 거 아니에요?
이틀 뒤에 중요한 무대 있는데… 아, 어떡하지, 진짜…
(말끝을 흐리며, 곁눈질로 조용히 그를 살핍니다.)
Severin Blanc:(…어, 통하나?)
Leander Fawn:어디 봐.
Severin Blanc:……(뭐야, 갑자기 죄책감 들잖아…)
(살짝 머쓱한 듯 턱을 긁습니다. 어디서 사고라도 당했나?) 아, 아니 뭐… 심하게 아픈 건 아니고요.
Severin Blanc:(발목에 낯선 사람의 손이 감기자 움찔합니다. 나 지금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Leander Fawn:움직이지 마.
Leander Fawn:(손가락으로 복숭아뼈 주위를 눌러보며 뼈와 인대를 따라 천천히 훑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지 않고, 감각만으로 붓기와 열감을 살핍니다.)
(관절의 회전 범위도 아주 조심스레 확인합니다.)
여기, 눌렀을 때는?
Severin Blanc:…음, 살짝?
Leander Fawn:(이번엔 발목을 안쪽으로 접으며 약간 꺾어봅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지만, 눈은 전과 다르게 어딘가 진지합니다.)
Severin Blanc:(…되게 신경 써주네.)
(꾀병 부린 게 조금 미안해집니다…)
그… (호칭을 잠시 망설입니다.)
…그쪽도 의사예요?
Leander Fawn:의사 면허는 없어. 그래도 발목에 관해서라면, 나보다 나은 사람은 드물걸.
Leander Fawn:인대나 뼈에는 큰 문제 없어. 붓기나 열감도 없고.
근육이 놀란 거라면 오늘 하루 냉찜질해.
Leander Fawn:애초에 진짜로 다쳤으면, 그런 식으로 걷지도 못했겠지만.
Severin Blanc:(…아픈 척한 거 들켰나? 슬쩍 눈치를 살핍니다.)
Severin Blanc:(속이 답답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빨대로 한 번 쪽 마십니다.)
그쪽… 아니, 이름이 뭐예요? 계속 이렇게 부르기 좀 그러네.
Leander Fawn:Leander. 
Leander Fawn.
Severin Blanc:어, 음… 리앤더 씨는, 무슨 일 하세요?
돈도 많고, 집도 엄청 좋고, 근데 나이는 또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아서요…
Leander Fawn:왜 그게 궁금한데?
Severin Blanc:아니, 그냥요… 그동안 저 후원도 해주시고, 저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알고 계시잖아요. 근데 저는 그쪽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요.
아, 또 그쪽이라고 해버렸네… 아무튼요.
Leander Fawn:알 필요 없어. 그냥 돈 많은 한량이라고 생각해.
Severin Blanc:아, 네… (존나 부럽네. 완전 내 롤모델인데.)
Leander Fawn:괜한 거 묻지 말고 이거나 먹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Severin Blanc:(그니까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참습니다. 그릇 위에 가지런히 놓인 마들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습니다.)
(……맛있네.)
(달달한 게 들어가니까 좀 진정했는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우물거립니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약간 어깨가 내려갑니다.) ……
Leander Fawn:발레는 어쩌다가 시작한 거야?
Severin Blanc:네? 아… 누나 따라서요.
연습하는 거 옆에서 보다 보니까 어느새 저도 같이 하고 있더라고요.
Leander Fawn:꽤 어렸을 때부터 한 것 같던데.
Severin Blanc:거의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했을 걸요? 첫 기억이 발레 교습소거든요. 누나 따라서 다리 찢겠다고 떼쓰다가 아파서 엉엉 울었던 거… 아직도 생생해요.
뭐,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한 건 그보다 뒤겠지만요.
Leander Fawn:(…엄청 술술 말하네. 디저트 때문에 경계심이 풀어졌나.)
다른 취미는 없어? 발레 말고.
Severin Blanc:어… 목공예? 제가 손재주는 좀 있는 편이라, 어릴 땐 나뭇조각으로 장난감 말 같은 거 자주 만들면서 놀았어요.
Leander Fawn:딱 어린애 취향이네.
Severin Blanc:에이씨. 말해줘도 난리야.
Leander Fawn:그래서… 학교는 왜 그만둔 거야?
Severin Blanc:(그 질문에 잠시 멈칫합니다. …아주 대놓고 뒷조사 했다고 티를 내네. 이제 와서는 상관 없지만요. 태연하게 디저트를 한입 베어 물며 대답합니다.)
쫓겨났어요.
동급생이랑 싸웠거든요. 크게.
Leander Fawn:…얼마나 대단하게 싸웠길래 학교에서 내쫓긴 거야?
무슨 이유로 싸웠는데.
Severin Blanc:그 자식이 시비를 털더라고요. 저더러 고아라고.
Leander Fawn:……
너 발레학교 수석이었던데. 수업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잘 듣고…
Severin Blanc:(도대체 얼마나 샅샅이 뒤진 거야… 징그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덤덤하게 말합니다.)
눈을 찍어버렸더니 수석이고 모범생이고 없던데요? 바로 퇴학행이었죠, 뭐.
Leander Fawn:……
억울하지는 않았어?
Severin Blanc:어쩌겠어요. 그런 개자식도 인간이라고 싸고도는 학교는 나도 싫어요. 씨발, 알고 보니 걔가 교장 손자라서 편애하는 거더만…
Leander Fawn:……
Severin Blanc:빽 달고 태어나면 참 편하겠어요. 미래를 다 알고 살아가는 기분이려나? 나는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썩을 극단에서 몇 년을 좆뺑이쳤는데…
Leander Fawn:많이 먹어.
Severin Blanc:(…마들렌 하나를 더 집어 입에 쏙 넣습니다. 입 안에 퍼지는 기분 좋은 단맛에 화가 조금 누그러집니다.)
……
그래도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Leander Fawn:응?
Severin Blanc:제 뒤에는 이제 아무도 없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동안 그쪽이 내 빽… 그런 거 되준 거잖아요.
그러니까 됐다고요.
Leander Fawn:……
Severin Blanc:(…뭐야, 뭔 고백 받은 것처럼 반응해?)
(…분위기 순식간에 묘해졌는데. 아씨, 이거 어쩌지.)
Leander Fawn:…그럼 할 말이 있지 않아?
Severin Blanc:네?
Leander Fawn:감사인사 말이야.
Severin Blanc:……
그럼 그쪽도 해야 할 말 있지 않아요?
Leander Fawn:뭐가?
Severin Blanc:아직 감상 못 들었는데. 그때 내 독무.
(레모네이드를 한 번 쪽 빨아 마시고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Leander Fawn:……(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다뭅니다.)
Severin Blanc:…뭐, 할 말 없으면 됐고요. 대신 투자한 값은 확실히 보여드릴게요.
결과로, 무대에서. 그거면 됐죠?
Leander Fawn:아름다웠어.
Severin Blanc:네?
Leander Fawn:아름다웠다고. 그때 너.
Severin Blanc:……(어?)
……아, 뭐. 그랬다면 다행, 이고요…
(우물쭈물하며 손끝을 굴리더니, 시선을 피합니다.)
Leander Fawn:(…부끄러워할 줄도 아네.)
……
그때… 왜 라 실피드를 한 거야? 잘 어울렸지만, 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던데.
Severin Blanc:(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리앤더가 화제를 돌리자, 잽싸게 그 흐름에 편승합니다.)
누나가 좋아하던 바리에이션이었어요.
Leander Fawn:…누님께서?
Severin Blanc:네. 통통 날아다니는 게 나비 같다나. 예전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남자가 좋댔거든요. 자기를 데리고 같이 날아가줄 것 같다고…
웃기죠. 정작 제임스는 현실과 꿈에 양다리 걸치고 바람이나 피는 개자식인데, 바보 아니예요?
몸 가벼운 남자가 뭐 좋다고.
Leander Fawn:확실히, 나랑은 취향이 다르시네.
Severin Blanc:…그쪽은 어떤 사람 좋아하는데요?
Leander Fawn:나는…
Leander Fawn:도망치고 싶어도 절대 내 곁에서 못 떠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귀엽더라.
Severin Blanc:와… 진짜 최악이네요.
Leander Fawn:농담이야.
(질색하는 표정이 귀엽다는 듯 웃습니다.)
그래서? 그게 다야?
Severin Blanc:아, 그리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라 실피드 배경 음악 작곡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Leander Fawn:Herman Løvenskiold 잖아.
Severin Blanc:그 사람 미들 네임도 알아요?
Leander Fawn:글쎄.
Severin Blanc:Severin이에요. Herman Severin Løvenskiold.
Leander Fawn:너랑 똑같네.
Severin Blanc:네. 그래서 누나가 운명이라고 좋아했어요. 우리 누나는 운명론자였거든요.
쓸데없는 미신 같은 것도 잘 믿었고... (과거의 해프닝이 떠오르는지 저도 모르게 웃습니다.)
Leander Fawn:……
누나를, 많이 좋아했나 보네.
Severin Blanc:(신나서 떠들던 수다가 그 말에 뚝 그칩니다.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가족이니까요. 하나 남은…
아, 아니, 이젠 없구나. 아무튼.
(…맞닿은 손을 비비적거리며 작게 중얼거립니다.)
…요즘도 가끔, 혼자 있을 때면 아직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막 문 열고 들어올 것 같고, 언제까지 퍼질러 자고 있을 거냐고 잔소리할 것 같고… 빨리 밥 먹으라고 성가시게 깨울 것 같고…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제는 안 오더라고요.
Leander Fawn:……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누님 분도 분명 널 무척 사랑하셨을 거야.
Severin Blanc:네? 아닐 걸요. 누나 저 엄청 싫어했는데. 막 때리고, 엄청 갈구고.
아,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Leander Fawn:그건 네가 맞을 짓을 했겠지.
Severin Blanc:씨, 제가 뭘요!
Leander Fawn:어쭈.
Severin Blanc:……하하, 제가 말을 좀 안 듣긴 했었죠. 그래요, 네, 인정할게요!
Leander Fawn:거봐.
(턱을 괴면서, 입꼬리로 호선을 그립니다.)
그래도…
자유로운 네 모습을 사랑했던 누님 분의 마음은,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Severin Blanc:……
어우, 닭살 돋거든요. 그런 눈 하지 마요, 진짜……(살짝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합니다.)
Leander Fawn:넌 좋은 말을 해줘도…
Leander Fawn:그러는 너는 어떤 사람이 좋은데?
Severin Blanc:저요? 돈 많은 사람. (즉답합니다.)
Leander Fawn:……
Severin Blanc:돈 존나 많고, 멀쩡한 집 있고, 호구라서 다 퍼주다가 일찍 죽는 뭐 그런 사람?
Leander Fawn:속물이냐.
Severin Blanc:뭘 새삼스럽게.
근데 그런 사람 하나 있으면, 나도 좀 쉬어볼 수 있잖아요.
매일 발에 피 맺히게 뛰지 않아도, 어디서 자냐고 걱정 안 해도.
그냥 하루 종일…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릴 수 있잖아요.
어디 나가서 웃지도 않고, 굽실대지도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거.
그걸 원하는 게 그렇게 잘못됐나…
Leander Fawn:……
Severin Blanc:그거 알아요? 그쪽 내 롤모델이에요. 돈 많은 한량이 내 인생 목표거든요.
근데 나는 절대 후원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나 혼자 먹고 마시고 하루종일 놀면서 펑펑 쓸 거야.
근데…(살짝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뗍니다.)
왜 그쪽은, 그런 거 안 해요?
왜… 나 같은 거한테 돈 쓰고, 무대 줘요?
Leander Fawn:……
Severin Blanc:혹시 그쪽, 아등바등 사는 하층민 도우면서 우월감 느끼는 타입이에요? 착한 얼굴로 남한테 생색내고… 그걸로 자기 위로하는 부류?
Leander Fawn:…뭐?
Severin Blanc:와… 맞나 보네.
그럼 결국 나도 그쪽도… 그냥 자기 사정에 맞춰서 남 이용하는 거 아닌가.
Leander Fawn:너… 꼬아서 생각하는 거에 재능 있다.
Severin Blanc:아님 말고요. (어깨를 한 번 으쓱합니다.)
근데요.
저는 그런 거 나쁘게 생각 안 해요.
뭔 속셈이 있든, 받은 쪽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됐으니까.
Leander Fawn:설마 고맙다는 말 돌려하는 거야?
Severin Blanc:…알아서 생각하세요.
Leander Fawn:(세베린의 말에 피식, 짧은 숨처럼 웃습니다. 오늘 얘 때문에 많이 웃네.)
너, 진짜 어리다.
Severin Blanc:뭐요?
Leander Fawn:내가 널 도운 게 왜 자기만족 때문이라고 단정해?
Severin Blanc:……어,
아, 아니에요? 그럼……
Leander Fawn:나도 너한테 원하는 거 있는데.
Severin Blanc:(그 말에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립니다.) …뭐, 뭘 원하시는데요?
Leander Fawn:먼저 말해봐. 넌 뭘 줄 수 있는데?
Severin Blanc:……(손끝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립니다.)
…저, 가진 거 없는데. 그쪽이 더 잘 아시잖아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애처롭게 올려다봅니다.)
Leander Fawn:(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내 짧게 숨을 내쉽니다. 불쌍한 척해서 마음 약하게 만들려는 속셈인 거 뻔히 아는데.)
연기력이 꽤 늘었네.
Severin Blanc:연기라뇨… 진짜예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저,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가진 거라고는 그쪽이 준 거밖에 없는데… 그걸 이제 와서 뺏어가려고요…?
Leander Fawn:……
Leander Fawn:(저거에 넘어가는 나도 멍청이다.)
적어도 시간은 있지? 내일.
Severin Blanc:어… 모레에 공연이 있긴 한데.
Leander Fawn:내일은 괜찮다는 거네. 어차피 하루 연습 쉰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잖아.
Severin Blanc:그렇긴 하죠. 근데 내일 뭐 하시게요?
Leander Fawn:내일 저녁 자선 무도회가 있어.
그 행사에 볼 일이 있는데, 파트너 없이는 입장이 안 되거든.
Severin Blanc:아, 그럼 같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Leander Fawn:어.
그건 할 수 있지?
Severin Blanc:그럼요! 마침 저도 오랜만에 파티에 가고 싶었거든요. 하하…
근데 보통 파트너는 이성을 데려가는 거 아니에요?
Leander Fawn:그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 아닌가.
Severin Blanc:아, 예…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갑니다.)
옷은 아무거나 입어도 되죠?
Leander Fawn:당연히 드레스코드가 있지. 파티 처음 가봐?
Severin Blanc:(처음 가보는데… 괜히 촌스러워 보일까 조용히 입을 다뭅니다.)
Leander Fawn:내일 오전에 옷 사러 갈 거니까 준비해둬.
Severin Blanc:파티 하나 가는데 옷까지 사야 돼요? (돈 아깝게.)
Leander Fawn:그럼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입고 가려고? 공식 석상에서는 그에 맞는 격식을 갖추는 게 예의야.
Severin Blanc:……(씨발,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투덜거리고 싶지만… 어쨌든 옷을 사준다니까요. 굳이 공짜를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Leander Fawn:그럼, 이제 다시 올라가봐.
집사에게 말해서 얼음이랑 천은 챙겨줄 테니 잠들기 전까지 대고 있어.
Severin Blanc:네, 네.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곧장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멈추고 뒤를 돌아봅니다.)
…리앤더 씨도 좋은 꿈 꾸시고요.
Leander Fawn:어. 너도.
Severin Blanc:(참 나, 구시대적인 게 누군데.)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에 폭 엎어집니다. 솜구름처럼 몽글몽글한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깊은 숨을 내쉽니다.)
(솔직히, 아까 원하는 거 있다고 할 때 심장 멎는 줄 알았습니다. 가진 거 없으면 몸으로 갚으라고 할까봐 개쫄렸네…)
(형편이 어려운 젊은 무용수에게 후원을 핑계로 연애나 성적인 접근을 강요하는 건 나름 흔한 일이었으니까요. )
(특히 발레는 본래 관능적인 예술이라느니, 에로티시즘과 맞닿아 있다느니 개소리를 지껄이는 미친놈들도 늘었고…)
……(인상이 쎄해서 좀 각오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Severin Blanc:(꾸물꾸물 몸을 뒤척이다가 천장을 바라보며 눕습니다. 더럽게 넓은 침대 위에 대자로 뻗은 채, 위에서 아른거리는 촛불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기묘한 기분이 듭니다. 어쩐지, 나답지 않은 짓을 한 것 같아요. 가식도, 연기도 없이 누군가를 대한 게 대체 얼마 만이더라. 누나 얘기를 꺼낸 것도…)
(그럼 반대로 나다운 짓을 했다고 해야 하나? …아, 모르겠다. 머리 아프니까 그만 생각하자.)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이미 실컷 자서 정신이 말짱할 줄 알았는데, 서서히 몰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아, 소화도 안 시키고 그냥 자면 안 되는데… 미친, 생각해 보니 나 마들렌을 몇 개나 먹은 거야?)
(모레가 공연인데 이러다 몸 무거워지면 어쩌려고. 내일은 진짜 물만 마시고 버텨야겠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 이내 흐릿해지고, 정신은 서서히 꿈속으로 가라앉습니다…)
ㅤ#3
부스럭,
Severin Blanc:(…뭐야. 누가 밤에 돌아다녀…)
(밤새 부슬부슬하게 뜬 곱슬머리를 손끝으로 헝클듯 쓸어내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킵니다.)
Severin Blanc:(미지근해진 천을 풀어 협탁 위에 내려두고, 조용히 방을 나섭니다.)
Severin Blanc:(와… 의사 일에 다과 준비에 손님 뒷바라지에 야근까지 시켜?)
(이건 뭐, 내 옛 단장 빰치는 악덕 고용주네.)
(월급은 얼마나 주려나. 2층 난간에 턱을 괴고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Severin Blanc:(…들어봅니다.)
Severin Blanc: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62
판정결과: 실패
Severin Blanc:(살짝 눈을 굴리다가,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갑니다. 문 옆에 바짝 붙어서 엿듣습니다.)
Severin Blanc:(약? 무슨 약?)
(위험한 약이라도 다루는 거 아냐? 마약 같은…)
(젠장, 어쩐지 인상부터 수상하더라니…… 입술을 잘근 물면서,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밉니다.)
Severin Blanc:(……얼굴이 살짝 창백해집니다. 아니, 진짜 마약 주사…?)
(잠깐, 이걸……내가 봐도 되는 건가?)
"가 봐."
Severin Blanc:(……! 들키기 전에 황급히 2층으로 돌아갑니다.)
Severin Blanc:
은밀행동
기준치: 50/25/10
굴림: 65
판정결과: 실패
(아니잠깐만요)
Severin Blanc:(…헉.)
집사: …이런, 손님이셨군요.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Severin Blanc:(떨리는 손을 틀어쥐고 조용히 침을 삼킵니다. 정신 차려, 정신…!)
화장실에 가려는데 위치를 몰라서요. 아직 안 주무시는 것 같아서… 여쭤보려고요.
집사: 묵고 계신 방에도 개인 화장실이 있습니다만…
Severin Blanc:…! 아, 맞다, 그랬죠. 하하… 잠결이라 그만, 깜빡했나 봐요.
그럼 저는 이만…
Leander Fawn:들어와.
Severin Blanc:예, 예? 아니 저 진짜 급해요. 지금 안 가면 실수할 것 같은데요.
(수치심이고 뭐고 다 버린 채,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서둘러 말합니다.)
Leander Fawn:내가 나갈까?
Severin Blanc:(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쌍욕을 간신히 삼킵니다. 그냥 지금 뛰쳐나갈까? 저 자식 다리 다쳤으니까 쫓아오지는 못 할 텐데.)
(…아니, 안 돼. 지금만 피해서 끝날 일이 아니야. 저 자식은 내 숙소도, 내 직장도, 내가 자주 가는 식당도. 심지어 신발 사이즈까지 모조리 다 알고 있다고!)
(어질어질한 머리를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는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발을 옮깁니다.)
Severin Blanc:……
Leander Fawn:……
Severin Blanc:……저, 저기,
Leander Fawn:어디까지 봤어?
Severin Blanc:(퍼뜩 고개를 듭니다.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할까? 아니면 솔직히 털어놓고 살려달라고 빌까?’ 두 가지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충돌합니다.)
(결국 후자를 택합니다.) 문도 살짝만 열려 있었고, 집사님이 가리고 있어서… 정말 거의 아무것도 못 봤어요!
Leander Fawn:거짓말.
Leander Fawn:그럼, 왜 그렇게 떨고 있는데?
Severin Blanc:아……(공포에 질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섭니다.)
그, 그건…
Leander Fawn:곤란하네.
아직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거든.
Severin Blanc:……!!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신경이 바짝 곤두섭니다.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아,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요! 정말이에요!
어디 가서 리앤더 씨 얘긴 입도 벙긋 안 할 거고… 아니, 그냥 아예 얼굴도 모른다고 할게요!
솔직히 리앤더 씨 후원 끊기면 저도 끝인데, 제가 리앤더 씨에게 불이익 갈 짓을 하겠어요?
Leander Fawn:네 말은 못 믿겠는데.
Leander Fawn:발, 멀쩡해 보이네?
Severin Blanc:(아, 맞다. X발…!)
그, 그럼…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에 머릿속이 쉴 새 없이 돌아갑니다.)
아니면 그 약… 저도 할게요!
Leander Fawn:뭐?
Severin Blanc:그럼 저희 공범되는 거잖아요. 저 신고도 못 하니까, 그렇게라도 해주세요, 네…?
Leander Fawn:…너, 무슨 소리를…
Severin Blanc:(머리를 바쁘게 굴려 시나리오를 짜냅니다. 후원, 파티, 그리고 마약…)
5년이나 공들이신 거면 제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혹시 제 유명세가 필요하신 거예요? 사교계에 데리고 다니면서 은밀히 마약 홍보라도 하려고요? 저 최대한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솔직히 이렇게 기회 날리면 아깝지 않으세요?
Leander Fawn:…마약?
Severin Blanc:저… 저한테 원하는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뭘 바라시는진 잘 모르겠지만,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Leander Fawn:……
Leander Fawn:그러니까, 내가 마약을 한다고 오해한 거야?
Severin Blanc:네, 네, 그러니까…
오해요?
Leander Fawn:확실히 내가 좀 피곤해 보이긴 했지.
근데 완전히 착각한 거야, 너.
Severin Blanc:(그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입니다.)
Leander Fawn:너… 내가 불법적인 일로 돈 벌었다고 생각했지.
Severin Blanc:……
Leander Fawn:이 자식이 단순한 호의로 날 후원했을 리 없다. 자선 파티도 마찬가지일 거다. 전부 다 위선에 불과하고 뒤로는 구린 짓을 하고 있을 거다.
Severin Blanc:……
Leander Fawn: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하필이면 '약' 같은 단어가 들리니까, 당연히 마약부터 떠올린 거지?
Severin Blanc:……(씨발, 정답이다… 뇌가 읽힌 것 같은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Severin Blanc:
심리학
기준치: 45/22/9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Leander Fawn:…마냥 어린 줄 알았는데.
감은 좋네. 잘 살아남겠어.
Severin Blanc:(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가늠이 안 됩니다.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레 눈치만 살핍니다.)
Leander Fawn:아무튼 마약과는 전혀 관련 없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마약을 하겠다는 멍청한 소리도 하지 말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다그치듯 말합니다.)
Severin Blanc:……하. (나무라는 듯한 말에 힘이 쫙 빠집니다. 허탈함과 자괴감이 동시에 몰려옵니다. 씨발, 나 대체 뭐하는 거야…)
……죽을까 봐 그런 거죠. 입막음으로 살해당할까 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고개를 깊이 숙입니다.)
마약중독자가 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Leander Fawn:……
(잔뜩 웅크린 어깨와 조용히 떨리는 정수리를 잠시 바라봅니다. '살고 싶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뼈저리게 알고 있죠.)
…(천천히 손을 뻗어, 잇자국이 남은 입술 위를 조심스레 쓸어냅니다.)
Severin Blanc:……! (고개를 흠칫 듭니다.)
Severin Blanc:(잠깐, 너무 가까운…)
Leander Fawn:그래?
살기 위해서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어?
(은근하게 속삭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입니다.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숨결이 섞이는 거리까지…)
Severin Blanc:……,
(말을 꺼내려다 삼킵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립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맴도는데, 몸은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습니다.)
(울렁.)
(목젖 아래로 쓴물이 치밀어 오릅니다. 아직 가시지 않은 공포에 손끝이 저려옵니다. 짙고 무거운 그림자가, 자신을, 단숨에 삼켜 녹여버릴 것만 같은데.)
……욱. (불가항력으로 헛구역질을 하고는 자신이 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Leander Fawn:……
Severin Blanc:죄, 죄송…아, 우욱, 윽… (핏기 가신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제 입을 황급히 틀어막습니다.)
Leander Fawn:……
……하아.
Leander Fawn:이리 와서 누워.
Severin Blanc:……?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풀린 눈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Leander Fawn:아무 것도 안 할 거니까. 그냥 와서 누워.
Severin Blanc:……(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침대에 올라가 눕습니다.)
Leander Fawn:(잠시 그대로 있다가, 상체를 일으키면서 말합니다.)
자리 바꾸자. 네가 안쪽으로 들어가.
Severin Blanc:……(별 반박 없이 엉금엉금 기어가 조용히 안쪽에 눕습니다.)
(그리고 메스꺼움이 좀 가신 후에야 뒤늦게 묻습니다.)
…근데 자리는 왜요?
Leander Fawn:너 도망칠 거잖아.
Severin Blanc:(거의 속삭이듯, 마른 숨과 함께 내뱉습니다.) …안 가요.
(못 가는 것에 가깝겠지만.)
Leander Fawn:그래.
그거면 됐어.
Leander Fawn:……
Leander Fawn:…이제 열은 완전히 떨어졌네.
Severin Blanc:(일부러 느릿하고 고르게 숨을 내쉽니다. 자는 사람의 리듬을 흉내내듯.)
(…빨리 다른 데로 좀 가버려라.)
Leander Fawn:……
Severin Blanc:(뭐 하는 거야?)
(한참을 버티다가,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빼꼼 뜹니다.)
Leander Fawn:깼어?
Severin Blanc:(…! 심장이 쿵. 떨어집니다. 이 자식 설마 계속 나 보고 있었던 거야…?)
(당황한 표정을 들킬까봐 얼른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Leander Fawn:그럼 이제 일어나. 벌써 해가 중천이야.
Severin Blanc:…(그 말에 상체를 엉거주춤하게 일으켜 세웁니다. 뺨 한쪽에 눌린 자국이 얼핏 느껴지는 게 민망해서 괜히 머리를 쓸어 넘깁니다.)
몇 신데요?
Leander Fawn:11시.
Severin Blanc:(오랜만에 진짜 푹 잤네. 그래서인지 머리가 개운합니다.)
Leander Fawn:머리는 괜찮아?
Severin Blanc:네?
Leander Fawn:너 어제 열 있었잖아.
Severin Blanc:아…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던 집사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제 내내 머리 아프고 나답지 않게 굴었던 게 열 때문이었나?)
이젠 괜찮아요.
Leander Fawn:그래.
Severin Blanc:(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가로질러 뻗은 팔을 다른 팔로 지그시 끌어당기며 뻐근한 몸을 깨웁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묻습니다.) 언제 나갈 거예요?
Leander Fawn:곧.
아침 먹고 싶으면 먹고.
Severin Blanc:11시면 아침 아니지 않나… 아무튼 전 패스할게요. 레몬물만 주세요.
Severin Blanc:(뭐야? 왜?)
(하지만 캐물을 용기는 없습니다… 뒤따라서 방을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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