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원자 x 발레리노 AU
* 서양배경으로 영문이름을 사용합니다.
김솔음: Leander Fawn
백사헌: Severin Blanc
* 시나리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시나리오의 원본 링크 : https://www.postype.com/@yelloduck72/post/9761711
* 사용한 인트로 링크 : https://colorname1357.tistory.com/63

(땀내 풍기며 뻑뻑 흡연이나 해대는 놈들 사이에서 폐를 깎아먹는 것보단 춥지만 바람이라도 통하는 계단에 앉아있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비록 곰팡내가 엄청나지만.)
(…게다가.)
(고생했어. 좋은 연극이었어. 관객수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하고 지들끼리 빈말 주고받으면서 위로하는 거 보고 있으면 진짜 토 나옵니다.)
씨발……(이딴 구질구질한 곳에서 엉덩이 붙이고 앉은 나도 병신이지. 한숨을 쉬면서 벽에 머리를 쿵 기댑니다. 좀 더 뻐기다가 들어갈 셈입니다.)

아, 단장님! 혹시 찾으셨나요? 전 잠깐... 여운 좀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대 감동이 너무 커서요, 하하…


(진심으로 이해 안 간다는 눈으로 자신을 가리킵니다. 뭐, 팬 같은 건가? 주연도 아닌 일반 단원 나부랭이한테?)


……어. (뭔데, X발.)


아, 그런가요? 종종 듣긴 합니다.
(일단 무난하고 순한 웃음으로 받아칩니다. 단장이 데려온 놈이라면 비위를 맞춰둬야 귀찮은 일이 덜 생기겠지.)
제 얘기를 어디서 많이 들으셨나 봐요? 관객으로 오신 거라면 제 얼굴 정도는 익숙하실 텐데… 뭐, 제가 무대를 자주 밟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상에 남는 얼굴이라는 평은 자주 듣거든요.

…아, 실례.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 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떨립니다.)
그럼 앞으로 더 많이 와주세요. 제 얼굴 보러.
자주 오시지 않으면 기껏 본 얼굴이... 다시 기억에서 흐릿해질 수도 있잖아요?
다음 번에 만나면 제가 먼저 인사드릴게요.
(최선을 다해 부드럽고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너라도 표 좀 팔아줘라. 입장료 그 쥐꼬리만한 돈을 득달같이 나눠먹고 있으니 나한테 떨어지는 게 있어야지……)


아, 아니… 제가 마음에 들어서 보러 오신 거 아니에요?
(살짝 당황합니다.)
다른 이유로 찾아오신 거면… 방금 말은 그냥 잊으시고요.



근데요. 왜 은근슬쩍 반말을……



뭐, 당신 발레 잘 알아요?

네가 이런 낡아빠진 극장에서 썩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그쪽이 꺼내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기어 나오겠다면 손 정도는 내밀어줄 수 있어.

씨발. 미친 새낀가.
야, 개소리 집어치우고 꺼져.

그래. 그 정도 날은 세울 줄 알아야지.
그런데 진짜 내쫓고 싶었다면 눈빛부터 정리하지 그랬어.
숨기고 싶은 감정은 좀 더 깊이 묻는 법도 익혀둬야 해. 연극은 무대 위에서만 하는 게 아니잖아?

남 사는 거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도 있고 한가해서 아주 좋으시겠어.
내 눈빛이 어떻든 감정이 어떻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훈계질이야. 공연 쳐보러 왔으면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고 꺼져.

그래서 부탁한 거였는데.
네 무대를, 진짜 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고 싶었거든.




…얼만데요.


아니, 그런 걸 준비해오셨으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선생님.
(어색할 만큼 돌변한 웃음과 함께 목소리는 단번에 부드러워집니다. 방금 전 욕설을 날리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갑자기 요청받은 독무. 지금의 자신은 무대 가장자리에 머무는 코르 드 발레에 불과합니다. 관객의 시선이 온전히 나를 향하는 경험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습니다.)
(…뭘 해야 하지. 조금 아연해진 채 무대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체온 유지를 위해 걸치고 있던 외투에 시선이 닿습니다.)
(떠오르는 옛날 기억. ……입을 꾹 다물고는 셔츠를 벗어 허리에 감습니다. 가죽끈도, 핀도 없습니다. 단지 헐렁한 셔츠 하나.)
(킬트를 대신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조악하지만…)
(정말 발레를 아는 놈이라면, 알아채겠지.)

(…그걸 하려나 보군.)
(시작하면 확신할 수 있겠지만, 직감이 먼저 웃고 있습니다.)

(고개는 정면이 아닌, 어딘가의 허공─마치 실피드가 사라진 자리를 더듬듯 올라가 있습니다. 눈빛에 갈등과 집착이 서립니다.)
(그리고─)


(완벽한 5번 자세에서 시작되는 뚜르 앙 레르. 도약과 회전, 착지가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도 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음 동작을 준비합니다.)


(직후 이어지는 동작은 주특기인 랑베르세입니다. 회전축을 정확히 잡은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유려하게 다리를 휘돌립니다. 발끝이 그리는 궤적은 마치 순간을 베어내듯 날카롭고, 허리의 유연한 각도와 팔의 곡선은 더없이 부드럽습니다. 미친, 방금… 진짜 완벽했어! 그 짧은 찰나에 환희로 벅차오릅니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등하던 청년은 무대 끝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팔을 허공으로 뻗습니다. 잡히지 않는 실피드를 갈구하는 제임스처럼.)
(끝. 정적. ……헉, 후우. 헐떡임과 함께 팔이 천천히 떨어지고, 환멸과 상실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텅 빈 눈으로 관객석을 바라봅니다.)

이제 전국에 다 알려졌네. 우리 발레단 자랑이야, 진짜! 얘들아, 이건 박수 한 번 쳐줘야 하는 거 아니야?

(과분하다는 듯 쑥쓰러운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겸손하게 말합니다.)
하하… 괜히 기대만 잔뜩하셨다가 실망하셔서 독설이라도 듣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관심 가져주시니… 영광이죠, 뭐.
다들 감사해요.

(이 사람 눈에 띄려고 내가 얼마나 개처럼 뛰었는데. 나 말고 다른 이름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아, 최근엔 공연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요… 신문 볼 겨를도 없었네요.
그래도 그만큼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무대 위에서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수줍은 듯 웃어 보입니다.)





(근데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춤이 어땠는지 입으로 듣게 해줄 법도 하지 않나? 그놈의 '짧은 감상평'이 전부야, 매번.)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 후원하는 건지, 내 성장을 지켜보면서 자기 만족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조용히 사람 하나 키워내는 걸로 우월감 느끼는 개싸이코새끼인 건지.)
(꿍꿍이를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이 사람 없었으면 아직도 그 싸구려 극단에 틀어박혀 있었겠죠. 내가 뭘 추든 좆도 관심 안 가지던 그 빌어먹을 극단.)
(어깨를 으쓱하며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브로슈어를 살펴봅니다.)

(어차피 꿈은 죽음, 사랑은 불륜, 구원은 배신으로 이어질 텐데.)
(결국 누가 더 ‘아름답게 부서지느냐’로 경쟁하는 무대에서 예술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나?)
(이번 극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악몽, 상처, 환상─죽음으로의 탈출.)
(언제나처럼 고통은 번지르르하게 포장되고, 춤은 죄다 눈물 젖은 시처럼 짜여 있죠. 그리고 꼭 주인공은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고요.)
(그런 걸 보고 감동했다느니, 아름답다느니 떠드는 사람들… 씨발, 그냥 남 고통받는 거 보면서 도파민 느끼는 거잖아. 진심으로 이해 안 됩니다. 미친놈들 아니야?)
(하지만 까라면 까야죠. 이게 내 밥줄이니까. 이득 앞에서 얼굴에 철판 까는 건 이제 체질이 됐습니다. 까짓것, 기대대로 완벽히 연기해줄게.)


(허리는 좁고 잘록하게 잡혀 있으며, 하의는 슬림한 컷의 검은 발레 타이즈를 입었습니다. 절제되었지만 선명한 라인이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립니다.)
(슈즈는 짙은 자주색 벨벳을 덧댄 소프트 슈즈. 얇은 은색 체인이 사선으로 교차된 슈즈는 피부처럼 발등을 섬세하게 감싸줍니다.)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4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관객은 '멜'이 아픈 건 감동이라며 받아들이지만, 내가 흐트러지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티내서는 안 됩니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2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느린 템포의 선율 위로 애티튜드 자세를 취합니다. 살짝 굽은 등,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동작.)
(몇 발짝 휘청이며 내딛는 샤세, 희미한 빛을 향해 손을 뻗지만 '멜'은 언제나 허공을 움켜쥘 뿐입니다. 이어 파 드 부레로 뒤로 물러납니다. 마치 꿈이 그를 밀어내듯.)
(고통에 발버둥치듯 푸에테 턴이 이어집니다. ……아, 방금 축 조금 흔들렸나? 일단 뻔뻔하게 다음 동작을 이어갑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큰 실수 없이 마무리 구간에 들어섭니다. 아파 보이는 표정이 오히려 더 먹혔을지도. 이 정도면 연습의 90퍼센트는 뽑아냈겠죠.)



(근데 침구, 되게 부드럽네… 비몽사몽한 채로 이불을 푹 끌어안아 몸을 파묻습니다.)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만… 상태를 보니 움직이시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그냥 바닥에 부딪혀서 아픈 건가? 아, 모르겠다.)
근데 여긴 어딘가요? 병원은 아닌 것 같은데.

주인 어른께서는 오래전부터 당신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곳은 그분의 저택이지요.


…근데 그분, 지금 여기 계신가요?

그, 혹시 주인 어른을 직접 뵐 수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신세를 졌는데, 인사 한마디 없이 머무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다면, 몸을 정돈하신 뒤 인사 나누시지요. 욕실은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씻을까.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며 거울 속 자신의 몰골을 힐끗 봅니다.)
(창백한 얼굴, 다소 퀭한 눈, 잔열이 도는 발개진 귀… 하.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립니다.)
(이런 꼴로 무대에 올랐으니 떨어질 만도 했지. 바보 같아.
(몸을 담그자, 딱 좋은 수온의 물이 스르륵 피부를 감싸안습니다.)
(전신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 아찔한 기분에,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툭 기댑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감습니다.)
(후원자라… 웃기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순수히 헌신하는 사람이라니. 그딴 게 세상에 존재할 리 없잖아. 결국은 다 계산이 깔린 호의일 뿐.)
(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유혹도 스치듯 지나갑니다. 포근한 물속, 편안한 고요가 맴도는 욕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공간 너머로 밀려난 것처럼.)
(…물 위에 손가락을 살짝 띄웁니다. 장미잎을 콕, 찔러 밀어내며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립니다.)

(어깨선이며 허리선, 심지어는 팔길이까지도 어색함이 없습니다. 처음 입는 옷인데 이상하리만치 익숙합니다.)
(한동안 거울 앞에 선 채 옷깃을 매만지며, 그 익숙함이 주는 묘한 감각에 사로잡힙니다……)
(후원자 놈, 설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집요한 변태 새끼인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돼, 제발.)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5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오랜만…(오랜만이네? 라고 말하려던 입술이 멈칫합니다. …반말을 써도 되는 걸까? 상대는 이 사치스러운 저택의 주인이자 자신의 후원자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을의 입장인데, 예의 없게 대했다가 괜한 불이익이라도 생기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존댓말을 쓰자니 그건 또 입이 까끌거립니다.)
(결국에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쳐다봅니다.)




(보란듯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십니다.) 입은 괜찮아?


그리고 다과도. 종류별로 빠짐없이.


마음에 안 들면… 무대에서 떨어지지 말았어야지.



지 몸 아니라고…(궁시렁거립니다.)



(그래도 지금 아픈 척하면 뭐 좀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네… 아파요.
(찡그린 얼굴로 발목을 매만지며 작게 숨을 쉽니다.)
아까 계단 내려올 때도 찌릿찌릿하더라고요. 이거 후유증 남는 거 아니에요?
이틀 뒤에 중요한 무대 있는데… 아, 어떡하지, 진짜…
(말끝을 흐리며, 곁눈질로 조용히 그를 살핍니다.)



(살짝 머쓱한 듯 턱을 긁습니다. 어디서 사고라도 당했나?) 아, 아니 뭐… 심하게 아픈 건 아니고요.



(관절의 회전 범위도 아주 조심스레 확인합니다.)
여기, 눌렀을 때는?



(꾀병 부린 게 조금 미안해집니다…)
그… (호칭을 잠시 망설입니다.)
…그쪽도 의사예요?


근육이 놀란 거라면 오늘 하루 냉찜질해.



그쪽… 아니, 이름이 뭐예요? 계속 이렇게 부르기 좀 그러네.

Leander Fawn.

돈도 많고, 집도 엄청 좋고, 근데 나이는 또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아서요…


아, 또 그쪽이라고 해버렸네… 아무튼요.




(……맛있네.)
(달달한 게 들어가니까 좀 진정했는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우물거립니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약간 어깨가 내려갑니다.) ……


연습하는 거 옆에서 보다 보니까 어느새 저도 같이 하고 있더라고요.


뭐,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한 건 그보다 뒤겠지만요.

다른 취미는 없어? 발레 말고.





쫓겨났어요.
동급생이랑 싸웠거든요. 크게.

무슨 이유로 싸웠는데.


너 발레학교 수석이었던데. 수업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잘 듣고…

눈을 찍어버렸더니 수석이고 모범생이고 없던데요? 바로 퇴학행이었죠, 뭐.

억울하지는 않았어?





……
그래도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근데 그동안 그쪽이 내 빽… 그런 거 되준 거잖아요.
그러니까 됐다고요.


(…분위기 순식간에 묘해졌는데. 아씨, 이거 어쩌지.)




그럼 그쪽도 해야 할 말 있지 않아요?


(레모네이드를 한 번 쪽 빨아 마시고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결과로, 무대에서. 그거면 됐죠?




……아, 뭐. 그랬다면 다행, 이고요…
(우물쭈물하며 손끝을 굴리더니, 시선을 피합니다.)

……
그때… 왜 라 실피드를 한 거야? 잘 어울렸지만, 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던데.

누나가 좋아하던 바리에이션이었어요.


웃기죠. 정작 제임스는 현실과 꿈에 양다리 걸치고 바람이나 피는 개자식인데, 바보 아니예요?
몸 가벼운 남자가 뭐 좋다고.




그런 사람이 귀엽더라.


(질색하는 표정이 귀엽다는 듯 웃습니다.)
그래서? 그게 다야?

라 실피드 배경 음악 작곡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쓸데없는 미신 같은 것도 잘 믿었고... (과거의 해프닝이 떠오르는지 저도 모르게 웃습니다.)

누나를, 많이 좋아했나 보네.

가족이니까요. 하나 남은…
아, 아니, 이젠 없구나. 아무튼.
(…맞닿은 손을 비비적거리며 작게 중얼거립니다.)
…요즘도 가끔, 혼자 있을 때면 아직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막 문 열고 들어올 것 같고, 언제까지 퍼질러 자고 있을 거냐고 잔소리할 것 같고… 빨리 밥 먹으라고 성가시게 깨울 것 같고…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제는 안 오더라고요.

누님 분도 분명 널 무척 사랑하셨을 거야.

아,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턱을 괴면서, 입꼬리로 호선을 그립니다.)
그래도…
자유로운 네 모습을 사랑했던 누님 분의 마음은, 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우, 닭살 돋거든요. 그런 눈 하지 마요, 진짜……(살짝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합니다.)







근데 그런 사람 하나 있으면, 나도 좀 쉬어볼 수 있잖아요.
매일 발에 피 맺히게 뛰지 않아도, 어디서 자냐고 걱정 안 해도.
그냥 하루 종일…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릴 수 있잖아요.
어디 나가서 웃지도 않고, 굽실대지도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거.
그걸 원하는 게 그렇게 잘못됐나…


근데 나는 절대 후원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나 혼자 먹고 마시고 하루종일 놀면서 펑펑 쓸 거야.
근데…(살짝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뗍니다.)
왜 그쪽은, 그런 거 안 해요?
왜… 나 같은 거한테 돈 쓰고, 무대 줘요?




그럼 결국 나도 그쪽도… 그냥 자기 사정에 맞춰서 남 이용하는 거 아닌가.


근데요.
저는 그런 거 나쁘게 생각 안 해요.
뭔 속셈이 있든, 받은 쪽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됐으니까.



너, 진짜 어리다.



아, 아니에요? 그럼……




…저, 가진 거 없는데. 그쪽이 더 잘 아시잖아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애처롭게 올려다봅니다.)

연기력이 꽤 늘었네.

저,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가진 거라고는 그쪽이 준 거밖에 없는데… 그걸 이제 와서 뺏어가려고요…?


적어도 시간은 있지? 내일.




그 행사에 볼 일이 있는데, 파트너 없이는 입장이 안 되거든.


그건 할 수 있지?

근데 보통 파트너는 이성을 데려가는 거 아니에요?


옷은 아무거나 입어도 되죠?






(투덜거리고 싶지만… 어쨌든 옷을 사준다니까요. 굳이 공짜를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집사에게 말해서 얼음이랑 천은 챙겨줄 테니 잠들기 전까지 대고 있어.

(곧장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멈추고 뒤를 돌아봅니다.)
…리앤더 씨도 좋은 꿈 꾸시고요.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에 폭 엎어집니다. 솜구름처럼 몽글몽글한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깊은 숨을 내쉽니다.)
(솔직히, 아까 원하는 거 있다고 할 때 심장 멎는 줄 알았습니다. 가진 거 없으면 몸으로 갚으라고 할까봐 개쫄렸네…)
(형편이 어려운 젊은 무용수에게 후원을 핑계로 연애나 성적인 접근을 강요하는 건 나름 흔한 일이었으니까요. )
(특히 발레는 본래 관능적인 예술이라느니, 에로티시즘과 맞닿아 있다느니 개소리를 지껄이는 미친놈들도 늘었고…)
……(인상이 쎄해서 좀 각오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기묘한 기분이 듭니다. 어쩐지, 나답지 않은 짓을 한 것 같아요. 가식도, 연기도 없이 누군가를 대한 게 대체 얼마 만이더라. 누나 얘기를 꺼낸 것도…)
(그럼 반대로 나다운 짓을 했다고 해야 하나? …아, 모르겠다. 머리 아프니까 그만 생각하자.)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이미 실컷 자서 정신이 말짱할 줄 알았는데, 서서히 몰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아, 소화도 안 시키고 그냥 자면 안 되는데… 미친, 생각해 보니 나 마들렌을 몇 개나 먹은 거야?)
(모레가 공연인데 이러다 몸 무거워지면 어쩌려고. 내일은 진짜 물만 마시고 버텨야겠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 이내 흐릿해지고, 정신은 서서히 꿈속으로 가라앉습니다…)

(밤새 부슬부슬하게 뜬 곱슬머리를 손끝으로 헝클듯 쓸어내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킵니다.)


(이건 뭐, 내 옛 단장 빰치는 악덕 고용주네.)
(월급은 얼마나 주려나. 2층 난간에 턱을 괴고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62 |
| 판정결과: | 실패 |


(위험한 약이라도 다루는 거 아냐? 마약 같은…)
(젠장, 어쩐지 인상부터 수상하더라니…… 입술을 잘근 물면서, 더 가까이 고개를 들이밉니다.)

(잠깐, 이걸……내가 봐도 되는 건가?)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65 |
| 판정결과: | 실패 |
(아니잠깐만요)


화장실에 가려는데 위치를 몰라서요. 아직 안 주무시는 것 같아서… 여쭤보려고요.

그럼 저는 이만…


(수치심이고 뭐고 다 버린 채,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서둘러 말합니다.)


(…아니, 안 돼. 지금만 피해서 끝날 일이 아니야. 저 자식은 내 숙소도, 내 직장도, 내가 자주 가는 식당도. 심지어 신발 사이즈까지 모조리 다 알고 있다고!)
(어질어질한 머리를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는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발을 옮깁니다.)





(결국 후자를 택합니다.) 문도 살짝만 열려 있었고, 집사님이 가리고 있어서… 정말 거의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 그건…

아직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거든.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신경이 바짝 곤두섭니다.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아,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요! 정말이에요!
어디 가서 리앤더 씨 얘긴 입도 벙긋 안 할 거고… 아니, 그냥 아예 얼굴도 모른다고 할게요!
솔직히 리앤더 씨 후원 끊기면 저도 끝인데, 제가 리앤더 씨에게 불이익 갈 짓을 하겠어요?



그, 그럼…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에 머릿속이 쉴 새 없이 돌아갑니다.)
아니면 그 약… 저도 할게요!




5년이나 공들이신 거면 제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혹시 제 유명세가 필요하신 거예요? 사교계에 데리고 다니면서 은밀히 마약 홍보라도 하려고요? 저 최대한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솔직히 이렇게 기회 날리면 아깝지 않으세요?


뭘 바라시는진 잘 모르겠지만, 하라는 거 다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오해요?

근데 완전히 착각한 거야, 너.








| 기준치: | 45/22/9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감은 좋네. 잘 살아남겠어.


마약을 하겠다는 멍청한 소리도 하지 말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다그치듯 말합니다.)

……죽을까 봐 그런 거죠. 입막음으로 살해당할까 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고개를 깊이 숙입니다.)
마약중독자가 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잔뜩 웅크린 어깨와 조용히 떨리는 정수리를 잠시 바라봅니다. '살고 싶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뼈저리게 알고 있죠.)
…(천천히 손을 뻗어, 잇자국이 남은 입술 위를 조심스레 쓸어냅니다.)



살기 위해서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어?
(은근하게 속삭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입니다.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숨결이 섞이는 거리까지…)

(말을 꺼내려다 삼킵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립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맴도는데, 몸은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습니다.)
(울렁.)
(목젖 아래로 쓴물이 치밀어 오릅니다. 아직 가시지 않은 공포에 손끝이 저려옵니다. 짙고 무거운 그림자가, 자신을, 단숨에 삼켜 녹여버릴 것만 같은데.)
……욱. (불가항력으로 헛구역질을 하고는 자신이 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하아.





자리 바꾸자. 네가 안쪽으로 들어가.

(그리고 메스꺼움이 좀 가신 후에야 뒤늦게 묻습니다.)
…근데 자리는 왜요?


(못 가는 것에 가깝겠지만.)

그거면 됐어.



(…빨리 다른 데로 좀 가버려라.)


(한참을 버티다가,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빼꼼 뜹니다.)


(당황한 표정을 들킬까봐 얼른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몇 신데요?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던 집사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제 내내 머리 아프고 나답지 않게 굴었던 게 열 때문이었나?)
이젠 괜찮아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묻습니다.) 언제 나갈 거예요?

아침 먹고 싶으면 먹고.


(하지만 캐물을 용기는 없습니다… 뒤따라서 방을 나갑니다.)
中 으로 이어집니다…




